2011.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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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움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내 말을 금방 이해할지도 모른다. 외로움이란 주위에 아름답다고 말할 만한 대상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뜻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에게만 아름답다고 말하니, 결국 그 무엇도 사랑하지 못할 때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리라. 하지만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길든 짧든 인생의 어떤 시기에 우리는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간다. 뜻밖에도 목숨은 질기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건 전적인 외로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외로움은 그 반대 경우다. 누구도 내게 아름답다고 말해주지 않는 순간, 다시 말해서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의 그 혼자라는 감정. 그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성자가 아니라면 지독한 근시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의 얼굴은 젖빛 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처럼 흐릿하다. 근시안은 원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또렷한데 자기 눈에만 그렇게 희미하게 보이는 게 아닐까고 생각할 테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젖빛 유리를 사이에 두고 바라본다. 원칙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은 하나도 없다. 나는 그다지 인간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세상이란 진즉에 포기하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그래서 말이 안 되지만, 우리는 갑자기 그 흐릿한 젖빛 영상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알아본다. 우리는 그 얼굴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처음 본 얼굴, 그런데도 아름다운 얼굴.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우리가 갑자기 누군가의 첫 얼굴을 알아보는 것처럼, 누군가의 첫 목소리를 알아듣거나 첫 냄새를 알아맡는 일. 그러기에는 목소리와 냄새의 세계는 너무나 명징하다. 명징한 세계에서 우리는 아무런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아름다운 목소리는 세월이 흘러도 아름답게 들리고, 향기로운 냄새는 언제 맡더라도 향기롭다. 하지만 우리가 첫 눈에 알아본 얼굴은 그렇지 않다. 우린 모두 우리가 알아본 그 첫 얼굴과 사랑한다. 그 첫 얼굴과 만나는 일은 단 한 번뿐이다.


 서로 첫 얼굴로 사랑하는 연인들은 모두 복되도다. 사랑에 빠지면, 그 순간부터 이 세상은 더없이 또렷하게 보인다. 세상의 끝까지 가봤기 때문에 이제 이해하지 못할 바가 하나도 없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런 게 바로 사랑이다. 젖빛 유리로 바라보는 것처럼 흐릿하던 세계 속에서 아름다운 얼굴 하나가 툭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 아름다운 얼굴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경험.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생각하면 늘 영국 밴드 더 큐어(The Cure)의 노래 「Just Like Heaven」의 도입부가 생각난다. 드럼 소리는 심장이 뛰는 소리다. 들리는가? 그 다음은 그녀의 말.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어김없이 듣게 되는 그런 말.

  어떻게 하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꺄악, 비명이 절로 나잖아.
  왜 이렇게 웃음이 터지는 거지?
  날 어떻게 한 거야?
  말해줘. 그럼 약속할게.
  널 따라갈게. 널 따라갈 거야.



 아인슈타인이 가르쳐준 물리학의 법칙.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 결과는 원인에 선행할 수 없다. 이 사실 때문에 시간여행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래의 자손이 선조가 되는 어떤 여자를 찾아가 지금 사랑하는 그 남자는 평생 그녀를 괴롭힐 것이니 절대 결혼하지 말라고 하면서 결혼 자체를 무산시키는 일은, 그러니까 일어날 수 없다. 그건 원인이니까. 마찬가지로 그 첫 얼굴 때문에 우리는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에 빠진 뒤에는 그 첫 얼굴을 다시 만날 수는 없다. 목소리와 냄새와 달리 얼굴은 처음과 달라진다. 반드시. 그렇기 때문에 연인의 얼굴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모든 속삭임에는 슬픔이 배어있다.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얼굴은 곧 달라질 테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지금 이 자리에서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뒤에는 감춰진 게 없다. 사랑은 둘 중 하나를 강요한다. 지금 사랑하든가, 사랑하지 않든가. 놔뒀다가 1년 뒤에 사랑할 수는 없다. 과거로 돌아가서 사랑할 수도 없다. 바로 지금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사랑하는 모든 연인들은 슬프다. 그들은 늘 지금을 갈구하지만, 지금을 잡으려고 하면 그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사진을 찍는 순간 그 모든 순간이 과거라는 사실이 저절로 밝혀지는 것처럼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은 지속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지금 이 순간의 일일 뿐이다. 순간순간,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고양된 감정, 혹은 또렷해진 이미지일 뿐이다.















댓글 4개:

  1. 덕분에 다시 읽네,

    마침

    사랑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기분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말이야.

    그래도 죽지않고
    이렇게 밤을 새워 (겨우 인터넷을 통해서지만) 사랑할 만한 것을 뒤지고 다니며 사네.

    아참, 오늘은
    오랜만에
    이 글 쓴 작가로부터
    안부를 묻는 메일이 와있어서 살맛이 좀 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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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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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어렵지.
    어렵지..

    ㅎㅎ

    나휴대폰없이 지내서 연락하기가 어렵네ㅋ
    뭐 나는 별 일없이 지내고 있어서 달리 해줄 말은 없지만ㅎ 너 얘기도 듣고
    그냥 맛있는 밥같이 먹고싶다.

    마침 이 작가 신간 출간기념으로 뭐 작가와의 만남 행사한다는데 신청해봐도 좋을 듯 하군ㅎㅎ
    여기서 신청할 수 있구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culturedate&catseqno=37425228

    일단 읽어보구 마음에 들면 말이야.ㅎㅎ
    그 중 몇 편은 아래 링크에서 읽을 수 있어.
    http://hook.hani.co.kr/archives/category/%EC%97%B0%EC%9E%AC%EC%B9%BC%EB%9F%BC/%EC%A0%95%ED%98%9C%EC%9C%A4%EC%9D%98-%E2%80%98%EC%97%AC%ED%96%89%EC%9D%98-%EA%B8%B0%EC%81%A8%E2%8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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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우왕 좋은 정보 감사 y.y

    저두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요 -
    연락 되는데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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