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세계를 ‘디지털 가속도 사회’라고 한다면, 이 가속도 사회에 누락된 가장 소중한 목록의 하나가 성찰력이라고 한다면, 이런 성찰적 불능을 교정시킬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자기제어, 자기지배의 반성능력 아닐까요? “가장 좋은 정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정부다”라고 괴테도 썼지요. 이 반성력의 고양을 저는 ‘예술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작품에 대한 심미적 경험에 기대어 체계적으로 하고 싶고, 이런 경험의 내용을 책으로 증거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심미적 경험이란 단순히 아름답고 고상하고 우아하고 멋들어진 것의 경험이 아닙니다. 그 이상이지요. 그것은 이런저런 감정적 파장 속에서 삶의 밝은 곳과 어두운 곳, 생활의 중앙과 변두리, 나와 그들의 미지의 관계를 자발적 성찰의 빛 아래 헤아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삶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영역으로 나아가는 낯선 체험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아가며 우리의 느낌과 생각을 단련하는 흥겨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감정과 사고의 유쾌하고도 불편한 실험장이 되지요. 그것이 유쾌한 것은 내가 기꺼이 선택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불편한 것은 기존의 감각적 사고적 타성을 언제나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요? 여기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시간이 오고 가는 길목에 서서, 이 시간이 오고감을 의식하고 사는 일이라고요. 행복한 사람은 저녁이 오면 창가에 앉아서 ‘음 저녁이군!’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 시인은 썼습니다. 반성은 자기의 시간을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노예처럼 타율적으로 끌려 다니며 사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으로 매일 매 순간을 현존의 충일성 속에서, 이 충일성의 벅찬 감격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반성은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반성은 푸코가 말한, 깊은 의미의 ‘자기배려(self-care)’이고 ‘자기돌봄’이기도 합니다.
자기애가 자기 밀폐적이고, 따라서 자기 넋두리와 자기 고백의 나열이라면, 자기배려는, 이 자기돌봄이 주체의 외부로 열려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내면성’의 계기가 됩니다. 내적이고 주체적이면서 상호주관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가지고 있지요. 예술의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문학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면, 그것이 결국에는 ‘자기 연관적’이지 않나 저는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인문학의 언어는, 특히 문학과 예술의 언어는 자기 자신(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자기를 벗어나 사회로 확장되고, 이렇게 확장된 사회의 외부현실로부터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자기만이 중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적 실존의 유일무이성으로부터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어떤 절실성의 궤적이고 파장이고 물결무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자기지시성 혹은 자기회귀성 혹은 자기연관성으로 인해 예술의 언어는 철학이나 사회과학 나아가 자연과학의 언어보다 뛰어난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철학의 언어가 개념규정적 논증적이고, 사회과학의 언어가 설명적 진단적이며, 자연과학의 언어가 실험적 증명적이라면, 이 모든 언어에는 이 언어를 부리는 주체(자기자신)는 간과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주체 자신의 자기반성적 자기연관적 맥락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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